[스크랩] 경제학사의 흐름

2007. 5. 6. 20:27지혜로운 삶

 

1. 중상주의 ( 重商主義 ~ mercantilism )

  16~18세기에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경제 이론과 정책들. 경쟁국의 국력 희생을 대가로 자국의 국력을 증가시킬 목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증대시킨다. 이것은 정치적인 절대주의의 경제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상주의 시대의 17세기 정치가들, 특히 영국의 토마스 먼,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콜베르, 그리고 이탈리아의 안토니어 세라는 결코 중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애닮 스미스가《국부론 Wealth of Nations》( 1776)에서 사용하면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중상주의에는 여러 가지 원리들이 결합되어 있다.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의 국가의 부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여겨졌다. 만일 국가가 광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거나, 귀금속의 입수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귀금속을 무역을 통해 획득되어야 한다. 무역수지의 순조(順調), 즉 수입에 대해 수출의 초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식민지는 수출 시장으로서 그리고 모국에 대한 원료의 공급 지로서 봉사해야 했으므로 제조업은 식민지에서는 금지되었고 식민지와 모국간의 모든 교역은 모국의 독점 하에서 이루어졌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민이 많아질수록 국가는 강해진다. 왜냐하면 대규모의 국민에 의해 노동력과 시장 및 군인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구는 최소화되어야 한다. 특히 수입된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더욱 더 제한되어야 하는데, 그것들은 귀중한 외환을 유출시키기 때문이다. 욕구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음식과 약품을 규제하는 사치단속법이 통과되었다. 절약․ 저축 심지어는 인색함이 덕목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서만 자본이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중상주의는 이윤을 보장함으로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훗날 중상주의는 심하게 비판을 받았다.



2. 중농주의( 重農主義 ~ physiocracy )

  18세기에 한나라의 부의 원천을 농업 생산에서 찾으려 했던 경제 사상. 중상주의 정책에 반대한 이론과 들로 가장 알려져 있다. 중상 학파가 국력과 국가의 안전은 농업보다 공업과 교역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고 본 반면, 중농학파는 오직 농업만이 생산비용을 초과하는 확실한 잉여를 생산한다고 봄으로써 토지와 농업을 모든 부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에 의하면 농업 이외의 생산형태는 농업생산물을 소비재의 형태로 바꿀 뿐이다. 비농업 교역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오직 자신의 노동 가치만을 생산물에 부가하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계급에 속한다. 농업 생산물이 고가로 팔려야 한다. 왜냐하면 농업소득의 증가는 곧 총생산물의 증가 또는 국력신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농학파는 생산적(농업) 계급과 비생산적(비농업․비광업) 계급 외에 토지 소유자를 자기 토지에 대한 지대를 받을 권리가 있는 독자적 계급으로 인정했다. 토지 소유자나 그들의 선조야말로 처음 일구고 가꾸어 농사 지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중농학파는 혁명 이전의 구체제 사회구조를 인정했다.

중농학파의 창시자는 루이 15세 때 궁전 의사였던 프랑수아 케네였다. 그의 대표 저서는 전체 경제과정을 최초로 도식화하여 보여주는《경제표 Tableau economize》(1785) 이다. 중농주의(physiocracy)라는 용어는자연이 지배한다는 뜻으로, 유명한 구호자유방임(laissez faire, laissez passer)은 자연법칙이 경제과정을 지배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들의 신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중농학파는 오직 농업만이 순수잉여를 산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는 순수생산물에만 직접단일 조세를 부과하는 한편, 당시 프랑스 경제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조세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1774년 재무장관에 올라 중농주의 사상에 입각한 몇 가지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주계급의 강력한 반발을 사 1776년 왕에 의해 해임되었다. 이와 더불어 중농주의의 영향력도 끝났다.



  ☞  중농주의의 특징

  자연의 통치를 신봉하고 자연의 질서와 순리에 순응할 것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아 경제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중농주의 학자들은 경제적 현상을 거시적으로 일관성 있게 체계화하였다.

3. 고전학파 ( 古典學派 ~ classical )

  영국의 경제 사상 학파. 18세기 후반 애닮 스미스부터 출발해 데이비드 리카도 와 존 스튜어트 밀에 의해 완성되었다. 1870년 무렵까지 영국의 경제 사상을 지배한 고전학파 이론은 주로 동적인 경제성장에 관심을 보이면서 경제적 자유를 강조하고 자유방임과 자유경제사상을 역설했다.

  고전학파 경제학의 여러 가지 기본개념과 원리는 스미스의《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1776)에서 잉태되었다. 스미스는 16세기부터 영국에 널리 퍼져 있던 중상주의 이론 및 정책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정부의 방해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자유경쟁과 자유무역이 이루어 질 때 한 나라의 경제발전이 가장 잘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사회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때 사회 전체적으로도 가장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기업체제하에서 각 개인은 다른 사람이 사려고 하는 상품을 사려고 하는 상품을 만들어 이윤을 얻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원하고 필요로 하는 상품을 사는 데 돈을 지출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구매와 판매의 혼란. 즉 경쟁이라는 명백한 무질서가 어떻게 질서정연한 경제적 협력체제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중앙통제가 아니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여건이 조성될 때. 비로소 전국민적 수요가 충족되고 국부가 증대된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유기업의 활동을 분석하면서 스미스는 노동가치론과 분배이론의 기본원리를 도입했다. 그 뒤 리카도는 저서《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1817)에서 2가지 개념을 모두 채택하고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 발전시켰다. 노동가치론에서 리카도는 경쟁상태에서 생산․ 판매되는 상품의 가치 즉 가격이 그 상품생산에 투입된 노동비용에 비례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공급과 수요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는 사실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가치론은 그의 분배이론과 더불어 고전학파경제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리카도의 분배이론은 국민생산을 3계급에 분배하는 3계급3분배분론(三階級三分配分論)으로서 전체생산물이 각각 노동자계급의 임금, 자본소유계급의 이윤. 지주계급의 지대로 분배된다고 보았다. 그는 모든 국민경제의 성장 잠재력에는 한계가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특정 사회계급이 총생산 가운데 더 많은 몫을 차지하려면 반듯이 다른 어떤 계급을 희생시켜야만 한다고 믿었다. 리카도의 여러 가지 이론은 고전학파 경제학의 결정을 이룬 밀의《정치경제학 원리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48)에서 다시 전개되었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은 19세기 중반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예를 들어 K.마르크스는 그 가운데 노동가치론을 채택해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논리적 함축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잉여가치론을 발전시켰다. 잉여가치론은 인간의 노동이 모든 가치를 창출한다고 보기 때문에 노동만이 유일한 이윤의 원천이라는 윤리적 가정에서 출발한다. 또 한편 고전학파의 경제사상은 자유무역주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론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으로서, 그 내용은 모든 나라가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부문에만 특화하고 그 밖의 다른 상품들은 모두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노동의 지역분화를 이루어 모든 나라가 완전한 우위를 점할 경우. 각 나라가 자급하는 것에 비해 보다 전세계의 생산규모는 반듯이 확대한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비교우위론은 19세기 국제무역이론의 초석이 되었다.



4. 역사학파 ( 歷史學派 ~ historical school of economics )

  19세기 후반 주로 독일에서 발달한 경제사상의 한 유파. 한 나라의 경제상황은 그 나라의 총체적인 역사적 경험의 결과 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고전학파가 연역적으로 추론한 경제법칙들을 부정하고, 역사적 접근방식에 기초하여 경제를 설명하고자 했으며, 순수한 경제적 동기들과 결정들은 전체 사회질서의 한 구성요소일 뿐이라고 보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전체 사회질서의 계속적인 발전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초기 역사학파와 후기 역사학파 모두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긍정적이고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초기 역사학파를 창립한 학자들은 빌헬름 로셔, 브루노 힐데브란트, 카를 크닉스 등이다. 역사적 방법에 관한 사상이 이들의 저작에 의해 발전해갔다. 이들은 경제 정책에 대한 평가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만 여러 사회들을 연구함으로써 모든 나라들이 반드시 거쳐 나가야 하는 일반적인 발전단계들을 유형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학파를 유명하게 만든 대부분의 상세한 역사적 연구는 후기 역사학파(대체로 1870년 이후)에 의해 이루어 졌다. 폭넓은 역사적 연구를 통해 문화적인 경향들을 발견하고자 했던 구스타프 폰 슈몰러는 후기 역사학파를 창립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슈몰러 외에 이 학파의 걸출한 인물들로는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크나프, 루요 브렌타노 등을 들 수 있다. 역사학파는 독일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유럽전역과 특히 미국 제도학파 경제학자들에 의해 미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5. 마르크스 경제학 ( ―經濟學 ~ Marxian economics )

  K.마르크스가 주저(主著) ≪자본론≫에서 집대성하고, N.레닌 등에 의해 계승ㆍ발전된 경제학의 체계.

  1845년 마르크스는 브뤼셀에서 F.엥겔스와 함께 독일 고전철학을 근본적으로 비판한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 그 속에서 유물사관의 기본구상을 도출하고 경제학 연구의 전제를 확립했다. 47년에는 ≪철학의 빈곤≫에서 P. J.루돌프 등을 비판하고 47년 말에는 자본주의의 기본관계를 명백히 한 ≪임금노동과 자본≫을 저술했으며, 유명한 ≪공산당 선언≫을 집대성하였다. 마르크스는 48-49년의 혁명 실패 후 런던으로 망명, 50~51년에 경제학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우선 47년의 경제공항 이후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전 단계에서 D.리카도 이론의 극복을 중심으로 18권의 노트를 작성하고 이어 57년의 공항을 계기로 57년 10월에서 58년 7월에 걸쳐 ≪경제학비판요강≫이라는 7권의 노트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 노트를 기초로 ≪경제학비판≫(제1권)이 나왔으나,『상품』과『화폐 또는 간단한 유통』의 2장만으로 되어 있었다. 그 계속인 제3장을 위해 다시 61~63년에 23권의 노트를 작성하고 그 중 학설사(學說史)부분을 집필 중에 제3장 아니라 독립된 저작 ≪자본론― 경제학비판≫을 구상하여 자본의 생산과정, 자본의 유통과정, 자본제적 생산의 총과정, 학설사의 4부를 구성하고 65년까지 3부까지의 이론적 부분의 초고를 작성, 67년 9월 제1부『자본의 생산과정』을 《자본론》제1권으로 간행했다. 그 후 제2부의 초고를 몇 번 고쳐 작성하던 중 완성 전인 83년 마르크스는 사망했다. 미완성의 유고는 엥겔스가 정리하여 85년에 제2부를, 94년에 제3부를 간행했다. 제4부는 1905~10년에 K. J.카우츠키가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 전3권의 독립저작으로 편집했으나, 56~62년에 소련 및 동독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의 편집에 의해 ≪자본론≫ 제4부(전3권)로 간행되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요약하면 가장 중요한 대전제로서는 변증론법적인 유물론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가 유물론적으로 부단한 정반합의 반복과정 속에서 발전한다고 보았다. 유물론적 발전과정에서 발전의 동인을 노동에 귀속시켰다.

노동가치설은 스미드나 리카도가 주장했으며, 그 이전에 페티( William Petty, 1623~1685 )가 주장했다. 생산의 제요소를 흔히 노동․ 자본 및 자연의 3대요소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상품의 가치는 그 재화가 포함하고 있는 노동의 투하량에 비례한다고 본 것이다. 자연이란 주어진 상태이고, 자본이란 과거의 노동이 축적된 것에 불과하므로 노동만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주장이다.

  그 이후에 연구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은 근본적 허점을 가지고 있다. ①노동의 질적 차이가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②실제의 가격결정은 투하노동량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역사적 현실이 지적된다. ③경제발전의 단계설에서 원시공산사회에서 봉건사회를 거쳐 자본주의사회로 발전했고, 최종적 귀결로써 공산주의가 도래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④잉여가치론에서 본원적으로 자본을 획득하는 문제를 다룰 때에도 이러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⑤임금을 생계비 정도밖에 안 준다는 것도 비현실적 가정이다.

  그의 이론의 전개 방법은 노동가치론의 초석위에 잉여 가치론을 세우고, 여기서부터 자본축적론이 나오고 그 결과로써 제국주의가 나타나서 세계적 전쟁을 일으켜 자본주의는 몰락한다는 변증론볍적인 유물론이다.




6. 한계효용학파 ( 限界效用學派 )

  최초로 한계효용의 개념을 도입한 사람은 버노울리(Daniel Bernalli, 1700~1782) 이다. 그는 스위츠랜드의 수학자로서 한계효용은 재화의 소비가 증가됨에 따라서 감소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튀넨(J. B. von Thunen, 1780~1850)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도시에 가까운 지방에서는 소득이 높은 채소나 과일을 재배하게 되고, 멀리 떨어진 데에는 운송비가 더들므로 주로 식량생산에 쓰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분석에서 튀넨은 일찍이 한계효용 개념을 이미 경제이론에 도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계효용이론을 가장 명확하게 연구한 사람은 독일의 곳센( H. H. Gossen,1810~1858)으로서 1854년에 한계효용의 이론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한 책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론은 제1법칙. 즉 한계효용은 소비가 증가됨에 따라서 체감한다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기의 만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각 재화의 한계효용을 균등하게 해야 한다는 제2법칙으로 구성되어있다.



7. 케임브리지학파

  리카도의 경제학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 약 반세기를 경과하였다. 그 동안 고전학파 경제학은 여러 학파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역사학파로부터는 그 추상성․ 비현실성을 공격받았으며, 오스트리아학파로부터는 노동가치론을 비난받았다. 그리고 마르크스 학파로부터는 그 부르즈와적 성격을 지탄받았다. 새로운 시대의 발전에 부응하여 리카도의 경제학은 재편성되어, 번영을 과시하는 영국자본주의에 어울리는 경제학이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그 임무를 수행한 것이 마샬이었다. 그러므로 마샬을 창시자로 하는 케임브리지학파를 일 신고전학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케임브리지학파의 이론은 고전학파의 변형으로부터 전해진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공격하였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그것은 노동자를 궁핍의 밑바닥까지 빠뜨린다! 고 비난하였다.

케임브리지학파는 이 마르크스의 공격으로부터 고전학파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였다. 고전학파에 있어서는 이윤의 원천이 애매한 채로 있었지만, 케임브리지학파에서는 분명히 절욕의 보수 자로서 간주되고 있다. 임금이 노동자계급의 고통의 보수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윤은 자본가가 부를 소비하지 않고 그 향락을 장래로 연기했던 것. 그리하여 자본이윤은 정당화되고, 적정한 이윤율은 필요한 자본액을 조달하는 데 필요한 공급가격의 구성요소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케임브리지학파의 이론은 고전학파의 이론을 변형하였지만, 실제로 고전학파가 갖고 있던 동태론의 측면은 빠지고, 주로정태론의 측면만이 새롭게 단장되어 등장하였다. 그것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과 제본스의효용가치론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마샬은 이 가격론 분야에서 정밀한 부분균형이론을 정성 드려 조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론은《분석의 도구상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후에 다양하게 이용되었지만, 고용문제나 경기순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 관한 거시적이고 동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케인즈가 신고전학파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파 경제학의 무능을 선고하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8. 케인즈 학파 ( ―學派 ~ Keynessian school )

  케인즈혁명 이후에 형성된 경제학상의 한 파. J. M. 케인즈의《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A. H. 한센․P. A.새뮤얼슨․L. R.클레인 등 1940~50년대의 아메리칸케인지언그룹에 주어진 명칭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의 경제학은 케인즈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케인즈 학파 대신 포스트케인즈학파케임브리지학파․네오케임브리지학파 보다 한정적인 뜻을 지닌 명칭이 쓰이고 있다. 이 학파에는 J. V. 로빈슨․N.칼도어․L. L. 파시네티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투자이며 기업이라는 케인즈의 주장(생산자주권론)을 지지하였다. 이것은 네오케임브리지학파에 대항하는 보다 큰 그룹이고 오늘날의 주류파 경제학을 형성하고 있는 신고전파(아메리칸케인지언․화폐수량주의를 포함)의 소비자 주권론적 자본주의관과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케인즈에 따르면 〈실업은 노동자가 화폐임금율 절하에 저항하기 위해서 해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러한 일이 진행된다면 생산비의 삭감에 따라 생산물 가격도 비례적으로 하락하게 되어 기업 관심사인 실질임금률의 인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효수요의 확대와 특히 투자의 증대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케인즈는 화폐이론과 투자이론을 중요시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소득수준은 유효수요의 규모에 의해서 결정되므로 아무리 엄청난 투자를 하더라도 수요가 없다면 오래 지석 할 수 없다. 수요는 크게 투자수요와 소비수요 및 정부수요로 나누어지며 소비수요는 소득에 의해 결정된다. 누구든지 가계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소득수준에 맞추어 소비하기 때문에 소비수준은 대개 안정적이며 소득보다 작다. 정부수요는 정치적 차원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경제에서 다룰 성격이 못된다. 그렇게 되면 남은 문제는 투자수요이다. 투자수요의 규모에 따라서 사회의 총수요가 결정되는데, 투자수요는 수익률과 이자율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자는 화폐량과 유동성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모든 사람은 유동성을 선호하고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 적절한 자본의 가격을 매긴 것이 이자율이다.

  블완전고용균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자를 발생시키더라도 투융자정책을 감행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된다는 것이 케인즈이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케인즈의 이론들을 보면 대개 주요 관심사들이 자원의 적정배분과 가격의 결정과정 및 가치의 근원이었다. 따라서 가치의 창조에 직접기여한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케인즈는 계측이 가능한 변수들을 주관심사로 삼았기 때문에 국민소득계정과 계량경제학의 발전에 자극을 주었다. 수리계량경제학이 케인즈이후에 꽃을 피우게 되고 또한 그것은 케인즈 경제학의 상징과도 같이 되었다. 그리고 고전학파에 비해서 한단계더 현실과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은 케인즈의 공로라 할 수 있다.    



9. 제도학파 ( 制度學派 ~ institutional school )

  1880~1930년대 말까지 미국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경제학의 한 학파. 미국에서는 19세기 중엽 이후 경제의 제도면을 중요시하여 사회의 제도나 구조와 관계지으면서 경제사실을 상세하게 고찰하고 사실에 밀착된 추상화되지 않은 이론을 전개하려는 성향이 강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영국의 고전파 및 1880년대부터 유럭화된 새로운 추상이론 중심의 경제학에 대한 반발과 미국에서 당시 급속하게 세력을 얻어가고 있던 독점적․금권주의적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조직화되었는데, 이것이 1910년대의 후반 무렵부터 제도학파라 불리우느 집단이다. 이 학파는 경제제도의 발전을 문화적 발전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미국의 경제학자 서스타인 베블린은 전통적인 정태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제도학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경제적인 결정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관습과 제도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보다  혀닐적인 인간상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베블린은 미국의 경제체제의 금본적인 동기를 기술적 진보에 의한 것이라고 보다는 금전적인 것으로 보았다. 기업활동은 재화의 생산보다는 재산의 축적을 위해 이루어진다.


10. 통화주의 ( 通貨主義 ~monetarism )

  화폐공급이 경제활동의 중요한 결정요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사상의 한 학파. 여기서 화폐공급이란 한 나라의 경제에서 주화․ 지폐․ 은행예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화폐의 총량을 말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일반적으로 통화주의의 대표자로 간주된다. 프리드먼과 그의 지지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지배적이었던 케인즈 학파와는 매우 상이한 거시 경제의 이론 및 정책을 주장했다.

통화주의 이론의 토대가 되는 것은 『M․V=P․Q』라고 표시되는 교환방정식이다. 여기서 M은 화폐공급이고 V는 화폐의 회전속도, 즉 1년동안 평균적인 화폐량이 재화나 용역에 지출되는 횟수를 가르킨다. P는 재화와 용역의 평균물가수준, Q는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양을 가르킨다. 통화주의자들은 방정식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인과관계가 작용한다고 믿는다. 즉 고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V하에서 화폐공급량이 증가할 때 사람들은 P가 상대적으로 고정적이면 Q가 증가하고,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양이 증가하지 않으면 P가 상승한다고 예상한다. 화폐공급의 변화는 생산․ 고용 및 물가수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의 결과는 장기에 걸쳐서 때로는 다양한 기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11. 새고전학파 ( new classical school )

  새고전학파 혹은 합리적기대학파는 1970년대의 높은 산업과 인플레인션이 공존하는『스태그인플레이션(stagflation)』현상을 기존의 케인즈학파이론으로 설명하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에서 출발하였다.

  통화주의학파는 케인즈 학파의 이론적기여를 많이 수용하는 입장이지만 새고전학파는 케인즈 학파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새고전학파의 이론적 뿌리는 고전학파에 있으며 동시에 통화주의학파의 프리드만모형은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되고있으며, 또한 그들은 고전학파의 주장처럼 장기-단기에 관계없이 총수요 관리정책이 무력하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학자들은 미국의 경제학자 루카스(R. Lucas), 사전트(T. Sargent), 왈라스(N.Wallance), 배로우(R.Barro) 등이다. 이들이 전개하는 이론의 기본적 공통특징은 ①고전학파모형과 같이 시장은 항상 청산(균형)되고, ②정조의 불완전성이 존재하며 ③합리적 기대(rational expectation)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새고전학파에 의하면 국민으로 하여금 물가가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게 만드는 체계적인 안정화정책을 단기적으로 무력하다. 예를 들면 실업률이 자연실업률을 초과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정부가 통화량을 증가시키서 총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정부가 실제로 통화량을 증가하면 예상물가에 즉각 반영되어 실제물가와 예상물가간의 격차를 즉각 해소시켜 버리게 된다. 이와 같이 정책이 충분히 예상(anticipated policy)된 경우에는 인플레이션의 대가만을 치르게 된다. 일반이 기대했던 이상으로 물가를 올리는 종잡을 수 없는 정책은 안정화 정책으로서 단기적으로는 유효하지만 국민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람직스럽지 않다. 따라서 새고전학는 고전학파와 통화주의학파처럼 재량정책이 불필요성을 제시하는 이론체계를 새고전학파(new classal)이라 부른다.



12. 새케인즈학파



13. 공급측면 경제학 ( 供給側面經濟學 ~ supply side economics )

  총공급을 중시하는 경제학. 국민경제가 완전고용수준(完全雇用水準)에 접근할수록 노동공급은 무제한으로 이뤄질 수 없으며, 따라서 총공급도 일정한 물가수준에서 계속해서 느릴 수 없게 된다. 대체적으로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는 총수요를 중심적으로 분석했다. 그러니 최근 들어 선진국경제가 완전고용수중에서 가까워져 총공급측면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한국의 경우 처음부터 총수요 부족보다는 총공급 부족이 실질적 문제였으므로 늘 총공급증대를 강조 해왔다. 따라서 공급측면의 경제학이란 한국에서는 새로운 것이 못된다. 미국에서는 공급측면의 경제학이란 사조(思潮)가 유행하고 있다. R.레이건 미국대통령이 공급측면을 중시하는 경제정책을 내세워 민간부분의 활력을 재생시킴으로써 미국경제 정상화에 힘썼다. 자원을 공급부분에서 자본재로 돌려 생산력 증가이나 물가수준을 안정시키려는 것으로 구체적인 방안은 소득세 감면조치와 정부지출 삭감이다. 케인즈적(的) 관점에서 보면 감세(減稅)가 소비지출 증대. 경기확대, 실업감소, 인플레이션 진정으로 연결되었지만 공급측면의 경제학에서는 감소조치가 저축증대, 이자율 하락, 투자의욕 증대, 생산력 증가, 물가안정의 효과 이외에 노동의욕․ 투자의욕의 증대, 생산력증대를 기대했다. 일반적으로 공급측면의 경제학배후에 있는 것을 시장기구 중심의 신고전학파(新古典學派)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공급측면의 경제학이 강조하는 감세와 정부지출 삭감 조치의 효과는 상당한 시일이 흘러야 나타난다.

출처 : 김연의 아름다운 세상
글쓴이 : 마릴린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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