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장보고의 청해진은 "산동성 정해위"
2007. 2. 19. 13:52ㆍ카테고리 없음
▒ 장보고 관련 지명지도

(1) 삼국사기 본기 및 열전
-> 구체적인 것은 오재성 저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다' 참고
-> 아래 내용 누락분 추가 함 (오타 수정 포함)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3년(828)
- 청해(淸海) 금지완도(今之莞島)
- 청해는 지금(고려)의 "완도"이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
-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문제는 삼국사기 "본기"를 통틀어 "금지(今之)"라는 표현은 오로지 여기 하나밖에 없다
왜일까 ?
중국 남제서 백제전 "이하결문" 표시후 백지 상태처럼 말입니다
(원문)

(2) 삼국사기 잡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삼국사기 "잡지"에서는
청해진(淸海鎭)은 조음도(助音島)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에서 청해진은
신라에서 사독제(종묘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여기에 청해진(淸海鎭)은 조음도(助音島)라 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
과거 백제땅에 신라가 종묘제사를 모셨다 ?
오래전부터 모셔오던 제사였다면 더욱 이상하겠지요
조음도는 어디인가 ?
(3) 청해진은 1만명 군사가 자급자족하던 곳 !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을 다시보면
청해진은 군사 1만명이 자급자족하면서 지킨 넓은 땅이었으며
후에 장보고가 재상이 되면서
당에서 신라땅 "사, 연수"로 돌아온 친구 "정연"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지키게한 곳이 청해진이었다
분명 당서에서는 장보고와 친구 정연은 같이 신라로 돌아 왔으며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에
정연은 신라땅 "사, 연수"에서 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왜 같이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
"금지 완도"와 관련이 있는가 ?
"금지 완도"는 언제 삽입이 되었을까 ?
국내 학자들은 "사수의 연수현"이라 해석한다
그렇다면 사수는 어디에 있는가
중국 송나라 우적도는 보았는가 ?
지명 "사"가 있는 곳 윗부분에 "사수"가 있다

(4) 산동성 정해위가 청해진일 가능성이 크다
산동성 "정해위"는 고지도에 의하면 "청해"로 표시된 지도가 있다
▒ 정해위 = 청해(확인함)

영풍문고(종로점) 소장 "한국의고지도" 원본 확인
- 저 자 : 이찬
- 출판사 : 범우사
- 출판년월 : 1997년 05월 20일
▒ 완도 위성사진

▒ 완도 소개도

▒ 진도, 완도 지도

▒ 당서, 삼국사기 원문비교

(5) 삼별초의 대몽항쟁
1270년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자,
삼별초는 8월에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와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계획한다
진도는 조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조운을 막으면 개경정부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 조운 (漕運)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
진도는 일본이나 중국과 교류하는 데 요충지였으며,
또한 진도 자체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배후에 무인세력의 기반이 있었던 전남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진도에 근거하고 있던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몇차례 물리쳤지만,
결국 원종 12년(1271) 5월 진도에서 쫓겨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에 입거한 뒤 삼별초는
원종 13년 4월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 의문점
완도는 청해진으로 "진"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요새화) 였으며
신라의 "사독제"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 였는데
왜 삼별초는 완도를 택하지 않고 "진도"를 항쟁 요충지로 삼았을까 ?
"완도"라는 기록이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
"강화도 - 진도 - 제주도"에 이르는 투쟁기 였다
과연 완도가 청해진 이었을까 ?
위 완도 위성사진과 진도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결 론
"금지완도"에서 금지가 "삽입문구"라면
금지완도 문구가 삽입되기전 원본 "삼국사"를 찾아야 한다
친구 정연이 살았던 "사, 연수"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왜 삼별초는 군사적 요충지 완도를 택하지 않고
진도에서 항몽투쟁을 전개하였는가 ?
산동성 정해위는 신라 청해진일 가능성이 높다
(완)

(1) 삼국사기 본기 및 열전
-> 구체적인 것은 오재성 저 '중국에 사로신라가 있었다' 참고
-> 아래 내용 누락분 추가 함 (오타 수정 포함)
삼국사기 신라 흥덕왕 3년(828)
- 청해(淸海) 금지완도(今之莞島)
- 청해는 지금(고려)의 "완도"이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
-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고려] 완도(莞島)라 부르는 곳이다
문제는 삼국사기 "본기"를 통틀어 "금지(今之)"라는 표현은 오로지 여기 하나밖에 없다
왜일까 ?
중국 남제서 백제전 "이하결문" 표시후 백지 상태처럼 말입니다
(원문)

(2) 삼국사기 잡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삼국사기 "잡지"에서는
청해진(淸海鎭)은 조음도(助音島)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에서 청해진은
신라에서 사독제(종묘제사)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여기에 청해진(淸海鎭)은 조음도(助音島)라 하였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
과거 백제땅에 신라가 종묘제사를 모셨다 ?
오래전부터 모셔오던 제사였다면 더욱 이상하겠지요
조음도는 어디인가 ?
(3) 청해진은 1만명 군사가 자급자족하던 곳 !
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장보고·정년"편을 다시보면
청해진은 군사 1만명이 자급자족하면서 지킨 넓은 땅이었으며
후에 장보고가 재상이 되면서
당에서 신라땅 "사, 연수"로 돌아온 친구 "정연"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지키게한 곳이 청해진이었다
분명 당서에서는 장보고와 친구 정연은 같이 신라로 돌아 왔으며
장보고는 청해진 대사에
정연은 신라땅 "사, 연수"에서 살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왜 같이 돌아온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
"금지 완도"와 관련이 있는가 ?
"금지 완도"는 언제 삽입이 되었을까 ?
국내 학자들은 "사수의 연수현"이라 해석한다
그렇다면 사수는 어디에 있는가
중국 송나라 우적도는 보았는가 ?
지명 "사"가 있는 곳 윗부분에 "사수"가 있다

(4) 산동성 정해위가 청해진일 가능성이 크다
산동성 "정해위"는 고지도에 의하면 "청해"로 표시된 지도가 있다
▒ 정해위 = 청해(확인함)

영풍문고(종로점) 소장 "한국의고지도" 원본 확인
- 저 자 : 이찬
- 출판사 : 범우사
- 출판년월 : 1997년 05월 20일
▒ 완도 위성사진

▒ 완도 소개도

▒ 진도, 완도 지도

▒ 당서, 삼국사기 원문비교

(5) 삼별초의 대몽항쟁
1270년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단행하자,
삼별초는 8월에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와
장기적인 대몽항쟁을 계획한다
진도는 조운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조운을 막으면 개경정부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 조운 (漕運) : 배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것
진도는 일본이나 중국과 교류하는 데 요충지였으며,
또한 진도 자체가 비옥한 농지를 가지고 있어 어느 정도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배후에 무인세력의 기반이 있었던 전남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진도에 근거하고 있던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몇차례 물리쳤지만,
결국 원종 12년(1271) 5월 진도에서 쫓겨 제주도로 건너갔다.
제주도에 입거한 뒤 삼별초는
원종 13년 4월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 의문점
완도는 청해진으로 "진"이라고 하는 것은 군사적 요충지이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요새화) 였으며
신라의 "사독제"를 지내던 성스러운 곳이 였는데
왜 삼별초는 완도를 택하지 않고 "진도"를 항쟁 요충지로 삼았을까 ?
"완도"라는 기록이 단 한줄도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
"강화도 - 진도 - 제주도"에 이르는 투쟁기 였다
과연 완도가 청해진 이었을까 ?
위 완도 위성사진과 진도 지도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6) 결 론
"금지완도"에서 금지가 "삽입문구"라면
금지완도 문구가 삽입되기전 원본 "삼국사"를 찾아야 한다
친구 정연이 살았던 "사, 연수"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왜 삼별초는 군사적 요충지 완도를 택하지 않고
진도에서 항몽투쟁을 전개하였는가 ?
산동성 정해위는 신라 청해진일 가능성이 높다
(완)
출처 : 쉬즈곤
글쓴이 : 쉬즈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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