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인강도사님 매주 수요일 설교!!!!!!

2009. 5. 28. 11:40김대인강도사 설교집

 

 

 

 

김대인 강도사 34번째 수요일 설교

2009.6.3

성장하여라

본문말씀 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우리의 성경 속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직접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고 굉장히 천국에 대한 설명을 정말로 잘 설명해주신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보면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바는 바로 그물과 물고기의 크기입니다. 그물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을 때는 정말 촘촘한 그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큰 물고기를 잡을 때는 큼직큼직한 그물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물고기의 크기에 따라 그물의 간격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그물은 작은 물고기도, 큰 물고기도 다 잡을 수 있는 촘촘한 그물일까요?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의 그물은 절대로 촘촘하게 배열된 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큼직한 고기를 잡는 간격이 넓은 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깨닫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가 그 천국의 그물에 걸리기 위한 큼직하게 성장한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부터 우리가 천국의 그물에 걸리기 위한 물고기가 되기 위한 이루어야할 성장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성장은 바로 믿음의 성장입니다.

이것은 물고기의 탄생과 같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존재를 깨닫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상에서 다 짊어지고 감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국이라는 곳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물고기가 탄생, 첫 번째 성장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 첫 번째 성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착각중의 하나가 교회를 얼마나 다니느냐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출석여부를 떠나 앞서 말한 하나님의 존재와 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사실을 얼마나 진실로 믿고 내 마음속에 담고 있냐 하는 것이 진정한 첫 번째 물고기의 탄생 또는 성장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서 물고기가 탄생하고 첫 번째 성장을 이루었다면 그다음 이루어야 할 성장은 바로 영적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이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또한, 그런 영적 세계의 비밀과 함께 은사를 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간단히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에도 있듯이 은사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부터 10절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 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어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린도전서 12장 8절~10절)

 

이처럼 굉장히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은사를 우리가 갈구하고 받음으로써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은사에 대해서 모르고 아직 영적인 성장인 제 2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며 심지어는 방언을 하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의 내용은 앞서보신 고린도전서 12장 말씀 있는 그대로의 내용이며 이러한 영적 성장, 제2성장이 이루어 져야 우리는 천국의 그물에 걸릴 수 있는 물고기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믿음의 성장은 있었지만 영적 성장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영적성장을 이루게 하시고 이방인으로 처음으로 구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 여기 제2성장에서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이 임한사람들이 각종방언을 했듯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그것은 올바른 제2성장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을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간혹 자신도 환상을 본다, 예언을 한다,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지 않은 환상이나 예언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마귀나 귀신의 장난일 뿐입니다. 이는 무당이나 박수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10절을 다시 봐도 은사들에 대해‘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자신도 음성을 다 듣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결국 성령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귀신의 음성이고 방해하고 장난치려는 마귀의 음성일 뿐입니다. 그런 음성을 따를 경우 처음에는 진짜 같고, 좋은 거 같지만 결국은 망하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성장 즉 영적성장을 이룰 때에 항상 이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 맞는지를 잘 판단하고 분별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번에 성장이 끝났다면 마지막으로 3번째 성장이 필요합니다. 3번째 성장은 바로 ‘말씀의 성장’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읽어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그물의 걸린 고기들을 끌어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1성장과 2성장 즉 믿음이 성장과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큼직한 물고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물고기가 기형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처럼 그저 버려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3번째 성장인 말씀의 성장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기형이 아닌 올바른 물고기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항상 믿음과 은사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즉 살찌워진 물고기를 유지하는 밥과 같은 것이며 영양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통하여서 성장하고 살찌워진 물고기로 유지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다시 비실비실한 물고기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은사만을 갈구하고 말씀이 그 안에 있지 않다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하여 기형물고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은사는 많이 받았는데 말씀이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자신 스스로를 예수라 하는 어느 사이비 교주처럼 사이비가 될 수도 있으며 은사만을 갈구하는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3가지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합니다.

첫째로, 믿음의 성장

둘째로, 영적인 성장

셋째로, 말씀의 성장

 

이런 세 가지의 성장이 다 이루어졌을 때 천국의 그물에 걸려서 하나님의 그릇에 담기는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치어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그물을 던지셧는데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자그마한 물고기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물을 던지셨을 때 ‘대어가 걸렸구나’ 느끼실 수 있도록 성장하여야합니다. 올바르게 성장하여야합니다.

 

이 시간 통하여서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성장, 영적인 성장, 또 말씀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셔서 천국의 그물에 당당히 걸리는 커다란 물고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3번째 수요일 설교

2009.05.27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크리스천

본문말씀 마태복음 4장 19절~20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마태복음 4장 19절~20절)

 

얼마 전에 기독교 IPTV를 보는데 어린이 명작만화로 예수님의 대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 것을 보는데 거기에 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독교 만화이다보니 굉장히 재미있게 되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본문말씀에 관한 내용을 보고나서 여러 가지로 묵상중에 이 베드로의 믿음에 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좇으라 하시니 바로 자신의 생업인 어부일도 관두고 모든 것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믿음이 없었다면...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조금은 엉뚱하고 뜬금없는 생각이지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베드로에게 그만한 믿음이 없었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제가 생각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그 능력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까?’입니다.

베드로는 하루 종일 형제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기위해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간 생업으로 살아온 어부일임에도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죠. 그런데 돌연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한번도 한적이 없는 물고기 잡이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 그것도 단번에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에게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분명 그 예수라는 사람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을 보았고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꼬시든지 붙잡아 놓아서 매일 많은 물고기를 잡아 부자가 되려고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말 엉뚱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그런데. 이런 저의 말도 안 되고 엉뚱한 생각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면서 우리크리스천들은 정말 말도 안되게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의 하나님이시고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축복의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이는 직접 체험을 했거나 또는 다른 이들의 간증등을 통하여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요즘 크리스천들은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축복주세요, 건강주세요, 또 뭐 주세요...’

이렇게들 많이 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안에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닌지 자신 스스로 돌아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축복주세요, 건강주세요’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말라? 이런 뜻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오늘의 본물말씀의 내용처럼 베드로가 실제로 그랬듯이 ‘모든 것을 버릴수 있는 마음가짐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믿음이 선행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구할 때 우선 그것을 우리가 내려놓을 수 있냐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축복이나 어떠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더라고 우리는 끝까지 그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고 믿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것이 망설여 진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안에 그 기적이나 축복만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그저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지 그저 구복신앙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구체적인 기도자세와 마음가짐이 무엇일까요? 그 답은 말씀 마태복음 6장과 골로세서 3장에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6장 3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여기 말씀처럼 우리의 포커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두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 물질적 축복을 기도 하시고 계십니까? 그러시다면 그 목적이 무엇인가 점검해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목적이 내 사욕을 위한 것은 아닌지 나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은 아닌지. 겉으로는 말로만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사업에 쓰겠습니다. 하나님 나라 확장에 쓰겠습니다 하는 것은 아닌지. 그 목적과 의미, 우리의 기도의 포커스가 축복이나 기도에만 맞추어져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진정으로 우리의 목적과 기쁨이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하나님 사업의 부흥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물질적 축복이 늦어지더라도 하물며 주어주지 않더라고 하더라도,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목사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분은 매주 로또를 구입하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그 로또가 되면 그 돈으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고방식이 올바른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겉표현 속에 자신의 사욕이 숨어있는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이고 행동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자신의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것이 굳이 자신만, 그것도 로또라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까?

 

 

또한 골로세서 3장 2절에도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를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골로세서 3장 2절)

 

이처럼 우리가 생각할 것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이나 기적에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축복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안해하고 초조해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는 땅에것에, 그 축복에만 우리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런 축복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더라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의를 먼저 생각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그 믿음이 마음가짐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선행되었을 때 우리 몸에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 사업에 기적이 일어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 기적이나 능력, 축복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소망하십시오.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소망하십시오. 이런 믿음이 선행될 때에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처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먼저’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열 문둥병자를 고치셨을 때 한명의 문둥병자만이 예수님에게 와서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있느냐? 그리고 대답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누가복음 17장 19절)

 

여러분 열 문둥병자가 모두 세상에서는 다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구원받은자는 다시 찾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단 한명의 문둥병자입니다. 그 나머지 아홉은 자신에 나은것에 포커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열명이 나아왔을 때 그 아홉은 자신의 나을 것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찾아온 그 하나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그 의를 먼저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음도 얻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 십일조에 대한 의문 이야기)

 

여러분 오늘 말씀 통하여서 그동안 하던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이용하려던 기도가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늘에 먼저 소망을 두십시오. 이것이 선행되어 있는 크리스천이야말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크리스천이 아닌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이시간 이후로 여기계신 모두가 하늘에 먼저 소망을 두셔서 땅에서도 또 하늘에서도 축복받고 상급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2번째 수요일 설교

2009.05.20

합심하여 하는 기도의 힘!

본문말씀 전도서 4장 12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12절)

 

오늘 말씀은 월요일에 제가 목사님과 함께 선목 총회 체육대회에 가서 예배중에 주신 말씀입니다. 체육대회 시작 전에 예배를 드리는데 그때의 예배의 말씀과 같은 본문말씀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은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같은 본문이지만 저에게 다른 말씀의 내용을 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장 12절)

 

이 전도서 4장 12절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은 바로 ‘합심하여 하는 기도의 힘!’ 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체육대회 시작 전 예배 때 다른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은 서로간의 교제에 관한 것이었는데 저에게 주신 것은 바로 같은 말씀을 통하여서 ‘합심하여 하는 기도의 힘’이라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기도라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아시죠?

기도로는 무엇이든지 가능합니다. 기도를 하면 이사야 선지자 기도를 통해 히스기야의 수명을 연장했던 것처럼 수명도 연장할 수 있습니다. 또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기적처럼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쫒아 낼 수 있습니다. 또한 물이 포도주가 되고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기도를 통한 기적과 이적들은 현재 이 시간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모잠비크라는 아프리카에서는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치유를 받고, 턱없이 부족한 식량으로 그 양보다 더 많은 인원이 배불리 먹는 일들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엄청난 파워를 지닌 기도! 이 기도를 우리가 합심하여 함께 기도한다면 그 능력과 힘이 배가 되고 더욱 걍력해진다고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나홀로 하는 기도는 너무나도 힘들고 외롭습니다. 혹시나 주변가족들은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홀로 예수님을 믿고 교회나가시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여쭈어보면 하나 같이 너무나도 힘들어합니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 하는 기도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말씀처럼 혼자 하는 기도는 질수가 있습니다. 힘들고 마귀의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 혼자 기도하려고 하더라도 가족들의 반대로 못하기도하고 또한 아예 교회를 가는 것 자체를 반대할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기도하다가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힘들어서, 지쳐서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 사람, 세 사람이 모이면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한사람이 지쳐하더라도 합심하는 기도자들이 있다면 붙들어 줄 수 있고, 위로가 될 수 있고, 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저희 가족 중에 목사님만이 기도자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목사님께서 하신 기도가 외롭고 힘들었을까 생각됩니다. 목사님께서 기도하시고 영적이야기를 하더라도 저희는 믿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제가 아프게 되고 그래도 우리 목사님은 밤낮으로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집안에서의 기도소리가 하나에서 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뿐만 아니라 우리 사모님의 기도가 더해진 것입니다. 저희 집에서는 새벽마다 우리 목사님과 사모님의 기도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렇게 목사님 나홀로의 기도에서 목사님과 사모님의 합심하여 하는 기도로 변화되자 저희 집안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 안에 귀신이 나가고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유명한 의사들도 다 손을 놔버린 병이 치유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우리 목사님과 사모님의 합심하여 하신 기도 덕에 치유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방해해 왔습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저는 믿음으로 병원에서 다음날 다시 입원한다는 각서를 쓰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온 바로 그날 갑자기 다시 코피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기적을 체험했고 나음을 입었다고 믿음을 가졌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갑자기 조금은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코피가 한번 나기 시작하면 40분 이상 그동안 흘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저를 믿음으로 기도로 붙들어 주신분이 저희 사모님이십니다. 정말 병원에서 코피를 흘릴 때 이리저리 걱정하시면서 병원 전체를 뒤집어 엎을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다니셨던 그러신 분이 정말로 담대하게 ‘코에 대고 기도하면 금새 멈출꺼야.’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같이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정말 5분도 안되어서 코피가 멈추었습니다. 마귀의 방해에 흔들리는 저의 마음을 붙을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혼자 기도하면 무너지기 포기하기 쉬운 것도 합심하면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연결고리가 되고 서로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처럼 한사람이면 패할 수 있는 것이 두 사람이 돼서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제 저희 가정은 저까지 포함해서 본문말씀 그대로 삼겹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희 가정은 이제 삼겹줄을 이루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지 이겨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마귀가 영적 방해, 물적 방해, 육적 방해를 하더라도 이제 저희 가정은 모든 것을 능히 이겨 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곳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기적과 이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이처럼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을 이루십시오. 합심하여 기도하십시오. 이 합심하여 기도는 그 어떠한 것도 대적할 수 있으며 견딜 수 있으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두발 자전거보다 세발자전거가 더 안 넘어지고 안전하듯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더욱 마귀로부터 안전합니다. 또 양손가락 하나씩으로만 잡은 것보다 두 개씩, 세 개씩 잡은 것이 더욱 단단하며 강력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 통하여서 합심하여 하는 기도의 힘을 깨달으시고 믿으십시오. 이렇게 서로 합심하고 중보하셔서 무엇이든지 어떠한 것이든 이루고 승리해 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1번째 수요일 설교

2009.05.13

용서하라.

본문말씀 마태복음 6장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2절)

 

요즘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등을 포함해서 복수라는 소재를 가진 드라마나 영화등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혹시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누군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 말 한마디 때문에 아니면 그 사람의 행동 하나 때문에 내가 너무 피해를 받거나 내가 너무 상처를 받아서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혹시 있진 않으십니까? 그 사람에게는 꼭 복수해야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해주신 주기도문의 한부분입니다. 함께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태복음 6장 12절)

 

여러분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하라고 알려주신 기도문에, 우리가 예배 때마다하는 기도 중에 이 구절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 본문말씀인 주기도문을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같이 우리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성립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면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기도문을 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주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서로 용서해야합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을 예배 때마다 하면서 막상 친구 사이나 형제 사이나 부부사이나 말 한마디, 행동 등에 자기가 상처를 받았다고 쉽게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기도는 ‘나를 용서해주지 마세요’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마음속에 용서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차라리 주기도문을 안 하면 안했지 도무지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까?

 

우리나라의 믿음의 선배님 중에 한분이신 손양원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께서는 신사참배를 당당히 거부하신 분이셨습니다. 그 분에게 아들 2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두명이 공산주의자에게 잡혀 죽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 범인을 잡게 되는데 이 손양원 목사님은 그 공산주의자를 용서를 하고 심지어 양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아들이 한명도 아니고 2명 모두를 죽이고 거기다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그 공산주의자를 용서를 넘어서 양아들로 삼으셨습니다.

 

그 당시 가족들의 반대에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내 두 아들은 죽어서 천국에 갔지만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은 지옥가게 생겼는데 전도자의 입장에서 어찌 그냥 둘 수 있겠느냐.”

 

여러분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어떠한 사연이 있으신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의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 이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보다도 더 용서할 수 없는 대상입니까?

 

여러분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랑의 부재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15장 12절)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신 계명이자 우리가 꼭 지켜야할 명령인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15장 12절 보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되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를 채찍질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인 것이 누구입니까? 인간이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구원해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아들 예수를 죽인 우리를 양아들로 삼으신 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를 양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듯이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을 불쌍히 여기어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못하고 옥에 가둡니다. 그 당시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오늘날 가격으로 대략 계산을 해보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을 7만원으로 잡으면 백 데나리온은 700만원 정도이고 일만 달란트는 4조 2000억 원에 해당합니다. 4조나 되는 엄청난 액수를 탕감 받은 종이 고작 700만원을 용서해 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노하여 그 종을 잡아 옥에 다시 가두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태복음 18장 35절)

 

다시 한번 간구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죄의 용서는 일만달란트 빚 탕감보다도 더 큰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용서받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 마태복음 18장 35절 말씀처럼 더 이상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통하여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셔서 오늘의 본문말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우리가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고 사랑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28번째 수요일 설교

2009.4.22

순교자의 삶

본문말씀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저는 묵상중에 문듯 몇 년전 김선일 피살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이라크의 무장단체에 의해서 피살되는 아주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인터넷이나 방송보도에는 이 김선일씨가 그저 평범한 이라크에서 근무하던 직장인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을 통해서 김선일씨가 무슬림 선교의 꿈을 안고 이라크로 간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여러분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도 기억하시죠? 23명의 피랍자중 21명은 무사히 한국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나머지 배형규 목사님과 한명의 하나님의 자녀는 처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그들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다, 불쌍하다 생각하실 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이 사건들을 ‘헛된 죽음이다’, 특히나 아프간 피랍사건에 대해서는 ‘가지 말라는 곳에 왜갔냐’ 등 온갖 비난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관점에서도 이런 그들의 죽음이 과연 헛되고, 아무 쓸모없는 일이었을까요?

 

그 답을 하기 전에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하겠습니다.

미국의 ‘짐 엘리엇’이라는 청년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기독교 명문인 시카고의 휘튼대학을 졸업하고 선교의 꿈을 안고 남미 에콰도르로 친구 4명과 함께 가게 됩니다. 그 곳에는 아우카 부족이 살고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아우카 부족은 수 백년간 외부인들이 들어오면 살해를 하는 악명 높은 부족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짐 엘리엇은 선교의 꿈을 안고 간 것입니다. 결국 짐 엘리엇은 1956년 1월 8일 28살의 나이로 창에 찔려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아프간 피랍 사건 때 세상 사람들의 온갖 비난이 있었던 것처럼 미국의 라이프지에서도 이 짐 엘리엇 사건에 대해 ‘What a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 짐 엘리엇 사건 이후 수십년 후에 그 아우카 부족 마을에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역사가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역사의 진실은 이렇습니다. 짐 엘리엇이 죽은 후 간호사 수업을 받고 있던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는 아우카 부족에게 갑니다. 그 아우카 부족은 찾아오는 외부인들을 다 죽였지만 여자만큼은 안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인 엘리자베스는 아우카 부족에서 5년간을 부족생활을 하면서 간호사 활동을 했습니다. 이제 5년이 지난 후 떠나려고 하자 부족 족장이 송별 파티를 벌여주면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대체 누구길래 우리 부족에게 와서 이렇게 5년간 우리를 도왔느냐?’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5년 전에 죽였던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남편이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당신들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 곳에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아우카 부족 사람들이 변화 되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엘리엇이 죽고 태어난 아들이 그 지역 교회의 목사가 되고, 또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엘리엇을 죽인 부족 청년들이 커서 그 지역의 교회의 장로와 교사로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세상적으로 볼 때 짐 엘리엇의 죽음은 너무나도 하찮고, 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죽음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짐 엘리엇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수 백년간 닫혀있는 부족 전체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큰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 죽음으로 시작된 것이 많은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하는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앞서 말한 김선일씨 사건이나 아프간 피랍사건 역시 헛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그들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고귀한 씨앗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었는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그 땅에 떨어져 죽은 씨앗이 많은 열매를 맺는 날이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전도와 선교를 위해 모두 다 이런 ‘순교자’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저는 주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님 저도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들처럼 선교를 가고 순교를 하여야 하나요?’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해주셨습니다.

‘목숨을 건 순교만이 순교가 아니다!’

‘순교란. 바로 목숨뿐 아니라, 너의 습관, 행동, 감정 모든 것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죽인다면 그것 역시 순교다!’ 이렇게 답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옛 습관이나, 행동, 감정 변화의 예... 술을 좋아하던 나의 과거. 욱하는 성격)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과거의 습관이나 성격, 행동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죽인다면 이것 역시 순교라고 예수님은 답해 주신 것 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순교자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우리의 안 좋은 습관들을 죽이고, 안 좋은 성격들을 죽이고, 행동들을 죽이며 살아가는 변화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 인은 이런 순교자의 삶을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이나 사소한 행동들이 어떻게 주변사람들에게 역사할지 모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짐 엘리엇의 죽음이 후에 아우카 부족 전체를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처럼 여러분 순교자의 삶을 통해 많이 이들의 본을 보이십시오. 그 본 보임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이름으로 술을 안마신다든지, 과거 습관들을 버린다는 지 하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씨앗이 되어서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을 전도하는 열매의 씨앗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과거의 습관들을 버리지 못하고, 안 좋은 성격이나 행동들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로 하여금 한 알의 밀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교자의 삶을 통해서 스스로가 한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