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인 강도사님 매주 수요일 설교 !!!!!!

2009. 7. 16. 13:23김대인강도사 설교집

 

 

 

 

 

 

김대인 강도사님 설교집

 

김대인 강도사 40번째 수요일 설교

2009.7.15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

본문말씀 출애굽기 4장 24절~26절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애굽기 4장 24절~26절)

 

오늘의 본문말씀의 내용을 살펴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 즉 애굽에서 이스라엘민족 사람들을 이끌어 내라는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위해 애굽으로 길을 떠나게 되죠. 그런데 오늘의 본문말씀인 출애굽기 4장 24절~26절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출애굽기 4장 24절~26절)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내라는 중대한 임무를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뜬금없이 모세를 죽이려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잘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 갑자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걸까? 중대한 임무를 맡기시고 나서 왜 죽이려 하시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신 것일까요?

 

여러분 그 답은 바로 오늘의 말씀의 제목에 있습니다. 바로 ‘완전케 하시는 하나님’즉! 모세를 완전케 만드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말씀의 내용의 숨겨진 내용을 찾아보면 모세에게는 십보라에게서 나은 아들이 두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째 아이에게는 하나님의 계명인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의 경우에는 모세가 어려서부터 애굽의 왕자로 자랐기에 여호와의 율법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랬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이는 할례를 시켰음에도 불고하고 둘째는 안한 것으로 보아서는 모세가 할례에 대한 계명과 의식 자체를 몰랐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즉 모세는 둘째아들에게 할례를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인 할례를 둘째아들에게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죽이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할례를 안 한 것 때문에 모세의 목숨까지도 거두시려고 했었던 것 이었을까요? 이런 하나님의 의도는 3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세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즉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막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내라는 막대한 임무를 부여하셨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까지도 치실 수 있는 그런 분이 라는 것을 모세로 하여금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을 다시 한번 모세에게 느끼게 함으로써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며 더 순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계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모세가 할례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모세의 안일한 태도 하나님의 계명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에 대한 경고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라는 작은 계명도 지켜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작은 것 하나라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로, 가정부터 잘 다스려야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자성어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이 있듯이 모세는 가정 안에서 둘째아들을 할례를 안 시키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애굽에서부터 해방시켜야 하고 또한 그들 모두를 다스려야하는 선택받은 자 였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있어서 가정부터 잘 다스리고 통제력과 리더쉽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길러주고, 또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 전체를 다스리기위해서 가정에서부터 그 통제력과 리더쉽을 길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떠나는 모세에게 본문말씀에서처럼 목숨까지 위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터치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 도구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단점과 결점, 부족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다 깎고 또 붙이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모세처럼 목숨까지도 걸려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맡은바 쓰임 바 되는 사명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도구로써 만들어 지는 과정이 더 힘들고 괴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더 크고 위대한 하나님의 계획일수록 하나님께서 쓰시는 그릇이 되기에 더욱 힘들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앞에서처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율법과 말씀의 중요성, 그리고 가정을 다스리고 민족을 다스릴 만한 통제력과 리더쉽등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 애굽에서부터 이끌어 낼 수도 없었으며, 또 출애굽이후에 40년 광야를 떠돌면서,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민족 사람들의 불평,불만과 불신속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그래도 온전히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땅으로 이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부족함 속에 있으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족하십니까? 건강적으로 부족하십니까? 영적으로 부족하십니까? 무언가 자신이 연단 중에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사명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힘든가? 얼마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어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에 이런 힘든 연단을 주시는 건가?’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욥기 23장 10절을 보겠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장 10절)

 

이 욥의 고백처럼 우리의 입에서도 이런 고백이 나와야합니다. 지금 받으시는 연단을 통해 정금같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완전한, 또 온전한 그릇이 되어서 하나님의 크신 위대한 계획에 있어서 맡은바 그 도구를 사용되십시오. 지금 비록 내 모든 것들이 깎이고 꺽여서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담대히 견디어 하나님의, 주님의 군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런 연단은 우리를 괴롭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대한 임무를 주셨기 때문입니다.(엘리선교회) 우리를 쓰시기 위해 완전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내하여서 하나님의 도구로 거침없이 쓰임바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큰 상급으로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9번째 수요일 설교

2009.7.8

낙심치 말라!

본문말씀 누가복음 18장 7절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누가복음 18장 7절)

 

말씀을 전하기 전에 누가복음 18장 1절부터 7절까지 전반적인 내용을 다시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고 하나님과 교제를 이룹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여쭈어 볼 수도 있고, 구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기도를 통해서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것이 물질적인 부분 일수도 있고 영적인 부분일수도 있으며 또는 육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던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것들을 기도로써 간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하는 만큼이나 그 간구의 기도의 응답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종종 기도를 도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저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너무나도 힘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제가 구하는 것들, 기도하는 것들이 너무도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너무나도 몸과 마음 모든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주님 분명히 주님께서 분명히 주님이름으로 구하고 찾으면 주실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이리도 늦어지나요. 너무나도 힘이 듭니다. 지칩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때 오늘의 본문말씀이 있는 누가복음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신 끈질긴 과부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바로 낙심하지 말라’라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과부는 자신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매일같이 찾아가서 원한을 풀어주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그 과부를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매일같이 찾아오니까 자신이 귀찮으니까 이 원한을 안 풀어주면 계속 과부가 자기를 찾아와 귀찮게 할 것을 알고 원한을 풀어줍니다. 대략 이런 비유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본문말씀 누가복음 18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누가복음 18장 7절)

 

이 과부가 끈질기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재판관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찾아갔듯이 우리도 끈질기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재판관도 자신이 귀찮아서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어서 이 과부의 청함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들, 또한 자녀되는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겠냐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과부처럼 무언가를 하나님께 구할 때 끈질기게 기도해야합니다. 중간에 기도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응답이 없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심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중간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과부는 매일 찾아갔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간구할 때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야합니다.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해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도를 끝까지 하지 못하고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하다가 응답이 오랜 기간 없으면 ‘아 이 기도는 안 들어 주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기억해야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여러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예수님 이름으로’구하는 것이고, 또한 그 구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예수님께서 행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신다고 요한복음 14장 13절~14절 말씀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낙심치 마십시오.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엘리야가 종을 7번 다시 보내어 구름이 있나 없나 물었을 때 6번만 보내고 기도를 포기했다면 손바닥만한 구름이 와서 비를 내리는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귀찮아하실 정도로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이루어 질 것입니다.

 

 

 

(엘리 선교회 이야기 -> 이 말씀 준비하면서 힘들었지만 이 본문말씀과 요한복음말씀 통해서 ->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예수님이름으로 구하는 것이기에 낙심치 않고 기도한다면 분명히 이루어 주십니다. 확신이 생김)

 

여러분 마라톤에서 결승점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만 그 결승점이 어디 있는지, 언제쯤 도착하는지 하나님만이 아시기에 조금 힘들뿐입니다. 하지만 그 마라톤에서 멈추거나 뒷걸음만 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승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지 마시고 끈질기게 기도하십시오.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가 지날수록 낙담하고 힘들어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낙심치 마시고 끈질긴 기도로, 지금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 기도들이 다 이루어져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8번째 수요일 설교

2009.7.1

오직 예수!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얼마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친구를 전도할 목적으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살아가면서 무엇이 인생의 목표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니?’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제 친구는 별다른 특별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뚜렷한 목표도 없었으며, 결론은 그냥 편하게 살다 죽는 것 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십니까?’라는 질문. 물론 이 질문을 받은 제 친구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현대인들 특히나 크리스천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목적으로 이세상을 살아가시나요?

 

그런데 아직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거의 같은 대답을 합니다. ‘하나님 믿으면서 편하게 사는 겁니다...’보통 이런 대답들로 귀결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믿음을 가진 크리스천이라면, 구원의 확신이 있는 분이라면 이런 대답 결코 바른 대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의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오직 예수만을 붙들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얽매여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늘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것들 세상적인 것들은 우리들에게 그저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본문말씀처럼 우리에게는 살든지 죽든지, 그 생사가 어떻든 무엇보다도 오직 주님을 예수님을 사모해야합니다. 말씀에도 차라리 죽어서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이 있고 무엇보다도 주님과 함께 있기를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과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적으로 편하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말과 입으로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에 그 한발을 담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한것들 육적이나 물적이나 정신적으로 부족한 것들만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랍니다. 몸이 아파 병이 있는 사람은 그 병이 낫기만을 바랍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적 축복을 내려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여러분 이런 병낫기를 원하고 물질적 축복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기도가 있기 전에 우리에게 정말 하늘에 소망을 두고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고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하는 기도를 해보셨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장 8절~9절)

 

살든지 죽든지 오직 예수만을 오직 주만을 바라는 그런 심령을 가지시기를, 그런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소망이 있음을 주님께 진정한 신령으로써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 저희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오로지 ! 저 스스로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원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 되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메일 이야기, 너무나도 가슴 아픔, 물질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나도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 하지만 제가 위로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우리가 그 사람이 실존인물이든 아니든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하나님 이름으로 그녀를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며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 사실 너무 가슴도 아프고 힘들었음. 그러나 마태복음 6장 25절~34절 말씀처럼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를, 또한 디모데후서 2장 4절 하나님의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게 하신다고 하고 했는데 백마 탄 군사인 우리를 그냥 두시겠습니까? )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적인 모든 것 아니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다 버리시고 진정으로 주 만 바라보는 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7번째 수요일 설교

2009.06.24

구원의 확신을 가져라!

본문말씀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얼마전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식사를 하는 중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즉각 OK하면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몇 명이나 될까?’,‘정말 이 세상에 조금의 미련도 없이 가차없이 갈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질문에 분명 말로는 쉽지만 정말 진정으로 우리 이간으로서 그런 조금의 미련도 없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것임을 알기에 감히 말씀드리지만 정말 몇 명 없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이 하나님께서 ‘얘야, 가자꾸나’이러시면 ‘잠시만요 하나님, 이것만 끝내고요, 이것만 해결하고요’... 이렇게 대답할 크리스천들이 허다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이렇게 미련이 남는 것일까요? 무엇이 우리에게 걸리는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다양하고 많습니다.

 

첫째로, 생명, 삶 자체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부르심에 미련이 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받으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분들을 보면 세상 온갖 치료를 다합니다. 몸에 좋다는 것들만 찾아다니고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다면서, 온갖 방법을 총동원 하여서 살려고 발버둥 칩니다. 하지만 여러분 진정으로 내 마음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내 이 세상 생명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그렇다고 자살을 하거나 일부러 죽으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죽음에 대해 초월해야합니다. 죽어서 천국 간다는 확신이 있는데. 하늘 나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데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걱정입니까?

 

저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우리나라에서 최고라는 의사를 찾아갔고, 최고라는 약도 사용하고 아직 실험도 채 끝나지 않은 신약도 써봤습니다. 제가 살고자 돈도, 다른 것 모든 것들을 다 받쳤습니다. 그러나 살려고 하면 할수록 저는 죽어갔습니다. 그때는 너무나도 죽음이 두려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구나’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제 죽든지 내일 죽든지 아무것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퇴원하면 죽는다’라는 의사의 말에도 담대하게 각서를 쓰고 퇴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의 확신입니다. 믿음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걸리는 것 중에 하나가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걸리기도 하고, 특히나 아들, 딸들인 자식들이 걸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께서 진정으로 구원에 확신있다면 하나님의 하늘나라로의 부르심에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천국에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인데 무엇이 걱정이고 망설일 일입니까? 다만 자식들이나 부모님이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잠시 부르심을 미루고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나 단지 내 아들, 내 딸, 내 아버지, 내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끈을 놓지 못하여서 하나님의 하늘로의 부르심에 망설인다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지 못한 것입니다.

잠시 말씀 마태복음 10장 36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장 36절)

 

저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원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원수,마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원수,마귀가 하는일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하나님보다도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가족을 나의 원수로 만드는 결과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4장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가복음 14장 26절)

 

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바로 하늘 나라로 갈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세 번째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물질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굉장히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내 소유, 내 것, 내가 번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우리의 소유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에게 돈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돈을, 물질을 자꾸 더 소유하려고 하고 유지하려고 합니다. 죽을 때 한푼도 가지고 갈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물질에 너무나도 집착을 합니다. 이런 집착이 하나님의 하늘나라로의 초대에 세상미련이 남아 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물질도 초월해야합니다. 세상 살면서 물질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래도 세상 살아 가는데 마냥 있을 순 없잖아요...’이렇게 많은 분들이 대답합니다. 그런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전에 마냥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어는 보셨는지요?’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족할 때 세상적으로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납작 업드려져서 무릎꿇고 하나님께 ‘나 다 내려놓습니다’하면서 기도해보셨습니까? 해보지도 않고서 하나님을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적으로 무언가 해야한다고 그것이 지혜로운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의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져야 합니다. 물질이 없다고 걱정하고, 물질을 못버려서 미련이 남는 것은 물질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닙니다. 물질에 얽매여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다스리는 권세를 통해 없어도 자유함을 얻고 있어도 가차없이 버릴수 있는 돈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주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생명에 미련이, 가족에 미련이, 물질에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마음속에는 이러한 미련들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잘 생각해봅시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왜 이런 미련이 남아있을까요? 그것은 아직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편하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편히 살고자 하는 마음, 내가 가진 것들을 유지하고자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길거리에 나아앉아도, 굶어 죽더라도 구원의 확신이 있고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기업으로 받았는데 무엇이 걱정이고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미련이겠습니까?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버리고 사도행전 1장 8절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아프리카나 아마존 같은 오지로 선교하러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건강이 없습니까? 먹을 것이 없습니까? 물질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안주시면 주님 손해십니다. 우리에게 건강주시고 먹을 것 주시고 물질 주시면 하나님 나라 확장에 엄청난 일을 할 우리들인데 안주시면 주님 손해십니다. 우리는 밑질 것 없습니다.’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신다면 주님께서 ‘아 요놈들을 빨리 사용해야지’하시면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말씀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 아닙니까? 이런 진리에 대한 확신이 우리에게 있다면 앞서 말한 우리가 하나님께서 당장 하늘나라로 부르셨을 때 미련없이 걱정없이 하늘로 곧장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우리가 알고 그 확신이 우리 마음에 있다면 걱정과 근심, 미련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우리들의 처소를 마련하러 가셨다고 하는데 아직 예수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처소 준비가 덜 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 들어갈 사람들이 아직 덜 준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곳에 있는 여러분 모두는 마음 속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셔서 이미 하늘나라에 처소를 예비하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대인 강도사 36번째 수요일 설교

2009.6.17

사랑이 곧 능력이다.

본문말씀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 34절)

 

말씀을 전하기 전에 제가 지은 영시 한편을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Love is Power

by. Dae in. Kim

 

I always prayed "Give me your Power"

But he gave me just "Lose"

 

I always prayed "Give me your Power"

But he gave me just "Offer"

 

I always prayed "Give me your Power"

But he gave me just "Victim"

 

I always prayed "Give me your Power"

But he gave me just "Effort"

 

When I can see his face

I can understand what he gave me

 

That is "L.O.V.E"

He said to me "Love is Power"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은 성령님께서 저에게 오늘의 말씀의 주제처럼 ‘사랑이 곧 능력이다’라는 응답을 받고 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이 사랑이 곧 능력이다. 라는 성령님의 말씀을 진짜로 사랑이 능력인지를 성경을 통해서 여러분께 증명하려고 합니다.

 

먼저 골로세서 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골로새서 3장 14절)

 

이렇게 골로세서 3장 14절에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표현 되어있습니다.

 

 

띠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전신갑주 이야기에서 진리의 허리띠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

 

“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에베소서 6장 14절)

 

진리의 띠라고 에베소서 6장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통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이고 이 띠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우리가 찾은 사랑이 온전히 매는 띠이고 또 진리의 띠이기에 예수님께서는 진리시면서 사랑이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랑은 진리이고 진리는 곧 예수님이라는 것이 말씀만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누가복음 10장 17절에서 19절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누가복음 10장 17절~19절)

 

자. 예수님께서 누가 권세를 주었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 곧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17절 귀신들이 누구 때문에 항복했습니까? 바로 주의 이름으로, 곧 예수의 이름으로 항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권세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귀신을 항복하게 하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단을 하늘에서 떨어트리는 능력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가 곧 능력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찾아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증명되었습니다.

사랑은 진리며, 진리는 예수님이며, 예수님은 곧 능력이다. 라는 것이 말씀만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은 곧 능력이다’라는 것이 증명 되었습니다.

 

 

 

사랑이 곧 능력이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직접체험하고 심령으로서 그 의미를 깨닫고 알고 있지만 이것을 머리로도 이해 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말씀만을 가지고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리기 위해서 오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설명되어있고, 또 진리가 무엇인지 또 예수님이 무엇인지, 또한 능력이란 무엇인지는 성경 전반에 많이 나타나 있지만 오늘 제가 전하는 말씀은 사랑이 곧 진리이고 예수님이고 능력이라는 것을 이 말씀만을 가지고 증명하기 위해서 또 정말 이 말씀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인지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과 감동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찾아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장 34절)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계명이외에 이 말씀처럼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왜 이런 계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라! 하셨는데 우리에게 오늘 사랑은 곧 능력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여러분 지금은, 이제는 우리가 능력을 행해야 할 때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예수를 통해서 능력을 해야 할 때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능력을 행하므로써 앞서 찾아본 누가복음에서 70인 파견을 통해 귀신을 죽이고 사단을 하늘에서 떨어트리는 권세를 우리가 가지고 행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정말 사랑을 통한 능력을 행하고 예수이름으로 많은 능력과 권세를 행하여 승리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우리들을 모으고 또 예수님의 군대를 육성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오늘 주제 ‘사랑이 곧 능력이다’라는 이 주님의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새겨서 주님의 정예부대 백마 탄 군사들의 선봉장이 되어서 앞으로 주님오실 날까지 승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김대인 강도사 35번째 수요일 설교

2009.6.10

성장하여라

본문말씀 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우리의 성경 속에는 천국에 대한 비유가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직접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고 굉장히 천국에 대한 설명을 정말로 잘 설명해주신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다시 보면 ‘천국은 그물과 같다고’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깨달은 바는 바로 그물과 물고기의 크기입니다. 그물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작은 물고기를 잡을 때는 정말 촘촘한 그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큰 물고기를 잡을 때는 큼직큼직한 그물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물고기의 크기에 따라 그물의 간격이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그물은 작은 물고기도, 큰 물고기도 다 잡을 수 있는 촘촘한 그물일까요?

 

저는 단호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의 그물은 절대로 촘촘하게 배열된 그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큼직한 고기를 잡는 간격이 넓은 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깨닫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가 그 천국의 그물에 걸리기 위한 큼직하게 성장한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부터 우리가 천국의 그물에 걸리기 위한 물고기가 되기 위한 이루어야할 성장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성장은 바로 믿음의 성장입니다.

이것은 물고기의 탄생과 같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존재를 깨닫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상에서 다 짊어지고 감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또한 그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국이라는 곳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물고기가 탄생, 첫 번째 성장입니다.

 

그러나 가장 이 첫 번째 성장에서 중요한 사실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착각중의 하나가 교회를 얼마나 다니느냐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출석여부를 떠나 앞서 말한 하나님의 존재와 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사실을 얼마나 진실로 믿고 내 마음속에 담고 있냐 하는 것이 진정한 첫 번째 물고기의 탄생 또는 성장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통하여서 물고기가 탄생하고 첫 번째 성장을 이루었다면 그다음 이루어야 할 성장은 바로 영적성장입니다.

 

영적인 성장이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깨닫고 또한, 그런 영적 세계의 비밀과 함께 은사를 받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간단히 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장에도 있듯이 은사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부터 10절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이 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어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린도전서 12장 8절~10절)

 

이처럼 굉장히 많은 은사들이 있습니다. 이런 은사를 우리가 갈구하고 받음으로써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은사에 대해서 모르고 아직 영적인 성장인 제 2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언하고 환상을 보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며 심지어는 방언을 하면 이단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의 내용은 앞서보신 고린도전서 12장 말씀 있는 그대로의 내용이며 이러한 영적 성장, 제2성장이 이루어 져야 우리는 천국의 그물에 걸릴 수 있는 물고기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고넬료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고넬료에게는 믿음의 성장은 있었지만 영적 성장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영적성장을 이루게 하시고 이방인으로 처음으로 구원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단 여기 제2성장에서도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했을 때 성령이 임한사람들이 각종방언을 했듯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그것은 올바른 제2성장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을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간혹 자신도 환상을 본다, 예언을 한다,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하지 않은 환상이나 예언이나 기타, 다른 것들은 마귀나 귀신의 장난일 뿐입니다. 이는 무당이나 박수와 같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절~10절을 다시 봐도 은사들에 대해‘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자신도 음성을 다 듣고 행동한다고 하지만 결국 성령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귀신의 음성이고 방해하고 장난치려는 마귀의 음성일 뿐입니다. 그런 음성을 따를 경우 처음에는 진짜 같고, 좋은 거 같지만 결국은 망하게 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성장 즉 영적성장을 이룰 때에 항상 이것이 ‘성령에 의한 것’이 맞는지를 잘 판단하고 분별해야합니다.

 

이렇게 두 번에 성장이 끝났다면 마지막으로 3번째 성장이 필요합니다. 3번째 성장은 바로 ‘말씀의 성장’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의 후반부를 다시 읽어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태복음 13장 47절~48절)

 

그물의 걸린 고기들을 끌어내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1성장과 2성장 즉 믿음이 성장과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큼직한 물고기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물고기가 기형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처럼 그저 버려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3번째 성장인 말씀의 성장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기형이 아닌 올바른 물고기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항상 믿음과 은사를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즉 살찌워진 물고기를 유지하는 밥과 같은 것이며 영양과 같은 것입니다. 항상 말씀을 통하여서 성장하고 살찌워진 물고기로 유지해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다시 비실비실한 물고기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은사만을 갈구하고 말씀이 그 안에 있지 않다면 자칫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하여 기형물고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또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은사는 많이 받았는데 말씀이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자신 스스로를 예수라 하는 어느 사이비 교주처럼 사이비가 될 수도 있으며 은사만을 갈구하는 신비주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3가지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합니다.

첫째로, 믿음의 성장

둘째로, 영적인 성장

셋째로, 말씀의 성장

 

이런 세 가지의 성장이 다 이루어졌을 때 천국의 그물에 걸려서 하나님의 그릇에 담기는 물고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치어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그물을 던지셧는데 그 사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자그마한 물고기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물을 던지셨을 때 ‘대어가 걸렸구나’ 느끼실 수 있도록 성장하여야합니다. 올바르게 성장하여야합니다.

 

이 시간 통하여서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성장, 영적인 성장, 또 말씀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셔서 천국의 그물에 당당히 걸리는 커다란 물고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